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비밀의 정원/행복한 詩間

옥수(玉水)역 <박시하>

by 인천송도인 2024. 5. 20.

 

이 허망한 봄날

겨울을 견딘 묵은 사과들이
소쿠리에 담겨 서로 껴안고 있다

 



 

이 내밀한 나의 공간에

아무도 오지 말라.

와도 온척 하지 말라.

 


<박시하 시인에 대해 어느 독자의 한마디>

 

시인의 시를 읽으면 늘 여름이 생각난다. 팔을 타고 흘러내린 수박물을 혀로 핥으며 멍하니 바라보는 여름빛. 그것은 희고 묽고 옅고 흐릿하다. 빛이 가득해 보이지 않는다.

8월은 바야흐로 한여름. 긴 비가 그치고 태양이 가장 왕성한 즈음. 잎사귀들이 징그럽게 우거지고 살아있는 것들이 일제히 냄새를 피우기 시작하는 시간. 그런데 빛이라니. 표백제를 한 통 가득 붓고 솔로 박박 문지르는 마음이라니. 청결하고 결벽한 언어가 돋아난다.

그런데 8월. 그래서 8월. 이제는 등에서 때가 나오지 않을 귀신이 되고 싶은데 여전히 목욕탕에 가득 앉아있는 알몸들. 부옇게 김 서린 얼굴들. 무엇 하나 또렷하지 않은 표정들인데.

시인은 소매를 걷고 힘껏 빛 속을 휘젓는다. 아빠가, 개가, 울먹이며 망설이는 소녀가, 귀신들이, 푸른 병에 담겨 귀환한 심장이 덜그럭거리며 튀어나온다. 여름은 생명의 클라이맥스. 곧 뼈만 남을 것들이 웅성거리며 근육을 키우는 날들. 우유처럼 희고 묽고 옅고 흐릿한 속에서 한기를 느낄 때마다 언 입술을 열어 노래를 부른다. 멈출 수 없다. 사랑하고 믿는 일을.

살아간다는 것을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