이 허망한 봄날
겨울을 견딘 묵은 사과들이
소쿠리에 담겨 서로 껴안고 있다
이 내밀한 나의 공간에
아무도 오지 말라.
와도 온척 하지 말라.
<박시하 시인에 대해 어느 독자의 한마디>
시인의 시를 읽으면 늘 여름이 생각난다. 팔을 타고 흘러내린 수박물을 혀로 핥으며 멍하니 바라보는 여름빛. 그것은 희고 묽고 옅고 흐릿하다. 빛이 가득해 보이지 않는다.
8월은 바야흐로 한여름. 긴 비가 그치고 태양이 가장 왕성한 즈음. 잎사귀들이 징그럽게 우거지고 살아있는 것들이 일제히 냄새를 피우기 시작하는 시간. 그런데 빛이라니. 표백제를 한 통 가득 붓고 솔로 박박 문지르는 마음이라니. 청결하고 결벽한 언어가 돋아난다.
그런데 8월. 그래서 8월. 이제는 등에서 때가 나오지 않을 귀신이 되고 싶은데 여전히 목욕탕에 가득 앉아있는 알몸들. 부옇게 김 서린 얼굴들. 무엇 하나 또렷하지 않은 표정들인데.
시인은 소매를 걷고 힘껏 빛 속을 휘젓는다. 아빠가, 개가, 울먹이며 망설이는 소녀가, 귀신들이, 푸른 병에 담겨 귀환한 심장이 덜그럭거리며 튀어나온다. 여름은 생명의 클라이맥스. 곧 뼈만 남을 것들이 웅성거리며 근육을 키우는 날들. 우유처럼 희고 묽고 옅고 흐릿한 속에서 한기를 느낄 때마다 언 입술을 열어 노래를 부른다. 멈출 수 없다. 사랑하고 믿는 일을.
살아간다는 것을.
'비밀의 정원 > 행복한 詩間' 카테고리의 다른 글
아들아, 딸아 아빠는 말이야 <김희정> (0) | 2024.06.23 |
---|---|
순창고추장 <이인철> (0) | 2023.06.26 |
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아요 <성기완> (0) | 2023.02.19 |
귀에는 세상 것들이 <이성복> (0) | 2022.08.26 |
버티는 삶 <박상우> (0) | 2022.08.08 |